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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길거리 특강(꿈이 있기에...당신은 행복합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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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Have...]
지은이 : MBC-TV '느낌표! - 길거리 특강' 제작팀
펴낸곳 : 중앙 M&B
군대시절...취침후에 몰래보던 생각이...캬아...
그때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요게 대박 히트쳐서...
내무실에 온통 무협지와 판타지소설이 뒹굴더라는...-_-;;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따는 생각을...
그리고 있을땐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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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있었기에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사랑과 희생의 연탄길을 위하여, 이철환
"연탄길이란 건 눈이 올 때 다 타고 남은 연탄재를 들고 나와서 깔아놓은 거잖아요. 연탄길은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고 자기 몸을 부셔서 길을 마련하는 희생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의 추억 속에 있는 연탄길은 가난한 겨울날의 배경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배경에 서서 추억 속의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다.
"사람들을 만난 뒤 꾸며진 이야기가 아닐 때만 글로 써나갑니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가난한 동네의 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그가 가르쳤던 아이들은 가난을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가난하다는 것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그는 말을 걸기 시작했고, 아이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 중에 참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어요. 종현이라고...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까 책상 위에 메모가 있더라구요.
"엄마가 장사하는 시장에 갔었습니다. 엄마는 머리까지 낡은 목도리를 칭칭 감고 차가운 시장 바닥에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종현이의 형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에요. 종현이가 그날 어머니께 왜 간거였나면, 며칠 동안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려고 돈을 좀 받으러 갔었던 건데.... 못 받고 돌아온 거죠. 종현이는 참 열심히 공부했어요. 마침내 서울대에 합격을 했습니다.
서울대 합격증을 받아서 엄마한테 갔는데 또 못 가겠더래요. 그래서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뒤에 가서 꼭 끌어안으며 "엄마, 나 합격했어"라고 얘기했대요. 그러자 어머니는 드시던 밥도 못 드시고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아들을 꼭 끌어안아준 거에요.
뇌성마비 형은 동생을 리어카에 태우고 그렇게 동네를 달리더랍니다. 아마 엄마나 형이 없었다면 그 아이는 그렇게 해내지 못했겠죠.
그가 종현이를 이끌어준 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자신 역시 그런 가난한 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우리 어머니의 걱정은 이런 거였어요.
"은행에 단돈 천 원이 없으니 누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하루는 친구들이 제 신발을 보고 거지 신발이라고 놀린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저희 앞에서는 못 드시고 돌아앉아서 안주 없이 술을 드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어요. 빗방울이 떨어지길래 양동이를 받쳐놨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손볼 걸 그랬어요."
어머니는 돌아누워 계시는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하셨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밤늦게 소주를 사러 나가시더라구요. 근데 안 들어오시는 거에요. 너무 걱정이 되어서 누나하고 아버지를 찾아나섰죠. 한참 후에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가 지붕위에 가만히 앉아계시는 거에요. 지붕 위에선 두 손을 다 써도 몸을 가누기가 힘든데, 양손으로 우산을 받쳐들고 깨진 기와 위에 앉아계셨습니다.
"아빠가 가족들을 위해 저것마저 할 수 없으면 슬퍼할지 모르니까....들어가자."
아버지는 새벽이 올 때까지 그렇게 앉아계셨어요.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남들보다 못한 하루하루, 그렇게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하루는 아파서 학교에 못 갔거든요. 저녁에 정신이 나니까 빵이 먹고 싶더라구요. 돈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한테 졸랐어요. 그때 유행하던 '애플빵' 기억하세요? 그 빵 광고는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애플빵."
혹시 사주실까 하는 생각에 4시간을 불렀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한테 무지하게 맞았아요. 아픈 뒤에 먹고 싶어 사달라고 한 아들을 때리는 엄마, 참 서운한 마음에 많이 울었거든요.
며칠 후에 어머니 얼굴에 피멍이 드셨어요. 다리도 절룩거리고...
근데 어머니 손에 애플빵하고 돼지고기 한 근이 들려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넘어지신거에요.
운전기사가 병원에 모셔가려고 했는데 어머니는 안 가도 되니까 돈을 조금만 달라고 하셨데요. 치료보다는 아들을 위한 애플빵과 돼지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오신 거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피멍들도 다리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거든요.
'왜 가난할까?'
그렇게 원망해본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가난했지만 그걸 통해서 사랑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만약 그런 시절이 없었더라면 지금 꿋꿋이 살아가는 어련운 이웃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글도 쓰지 못했을 것 같아요.
유년 시절의 그를 떠올리며 얘기를 듣는 동안 벌써 강의 시간이 되었다.
"강의까지 찬 마룻바닥에서 하게 되어서 죄송하네요."
대학 농구팀을 위한 강의였으므로 강의 장소는 당연히 체육관이었지만, 이곳이 어쩐지 찬 방바닥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제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였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친구의 유언은 아이가 태어나 첫돌이 되면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노란 봉투를 열어보라는 거였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첫돌이 되어서 아내는 남편의 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방 안에 있던 노란 봉투를 열었을 때, 봉투 안에는 엄마, 아빠, 아기가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과 돌반지,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야, 슬퍼하지 마. 아빠가 우리 곁에 있잖아."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지만 친구의 사랑은 그들의 마음에 강물처럼 흐를 거라고 믿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은 그 사랑을 닮은 다른 사랑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은 이어지는 거죠.
글쎄요...아이가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아버지의 사랑만은 가슴 속에 간직하며 자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펼치며 살아갈 겁니다. 그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가 전하는 아주 큰 선물이죠.
사실은 제가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제게도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가난 땜누에 모욕을 당한 적도 있었고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 가난은 저의 또 다른 선생님이었습니다.
사과 두 개가 생겼을 때 그 두 개의 사과로 나와 누나와 형, 그리고 부모님 몫까지 나누었던 일. 그런 일들을 통해 저는 나눔이라는 걸 배울 수 있었거든요. 사과가 한 개씩 모두 돌아갔다면 나누는 것 배우지 못했을 텐데.....
여러분은 연탄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죽을 뻔한 기억입니다. 어릴 적에 잠을 자는데, '이러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연탄 가스에 중독된거죠.
저도 모르게 발작을 하다가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방문에 머리를 부딪히고 넘어졌어요.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가족들을 모두 깨워서 우리 가족이 모두 살아났거든요. 그날 저녁, 연탄불도 때지 못하는 차가운 방에 식구들이 누워있는데, 그 때 우리 누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노래가 끝나자 아버지는 박수를 치셨습니다. 그날따라 아버지가 오버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우셨습니다. 저도 따라 울었죠. 제가 힘들었던 시절을 겪지 못했더라면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지 못했을 거에요. 그런 가난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3개월 전쯤에, 중 2때부터 가르쳤던 한 학생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학생이 사는 산동네로 찾아갔습니다. 아쉽게도 재개발에 묶여서 허물어졌더라구요.
그런데 어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저 운표예요....."
정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지금 뭐하냐?"
"제 꿈 아시죠?"
"이뤘니"
"전 한다면 하잖아요."
지금 서른 살인데 항공기 조종사로 꿈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기뻤습니다. 여러분 각자 자기의 꿈을 이루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믿고 있거든요. 오랫동안 꿈을 가진 사람들은 그 꿈을 닮아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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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약속을 지킬겁니다.] - 웃음을 처방하는 의사, 김태식
저에게는 내 생애 가장 크고 뜻깊은 약속이 있습니다. 제 아들과의 약속인데요, 그 녀석이 저에게 부탁을 하더라구요. 고통받고 소외당하고 어렵고 외로운 분들을 위한 의료를 펼쳐달라고...
그는 자신이 행한 선행이 아들과의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특별한 약속을 남긴 그의 아들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에게 가장 크고 뜻깊은 약속을 하게 만든 그의 아들은 어떤 아이였을까? 그는 아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점점 더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아들.....유성이.....유성이는 2년 반 전에 식구들을 두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유성이가 중학교 졸업했을 때, 제가 전부터 계획한 것이 있어서 인도네시아로 의료 봉사를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에서 5개월 만에 증상이 생긴 거에요. 급성 골수성 백혈병.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유성이가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호흡곤란증'이라는, 폐가 안 펴지는 병에 걸렸었거든요. 모두들 유성이가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 살아났어요. 그때 유성이의 주치의였던 친구가 17년만에 백혈병 담당하는 전문의로, 유성이는 백혈병 환자로 다시 만난 거에요.
2년 반 동안 투병하는데 백혈병이 네 번이나 재발하니까 더 이상은 쓸 항암제도 부족하고, 마지막에 일 주일 동안은......참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죠. 외국에 살던 분이 국내에 들어왔는데, 그분은 교통 사고로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거든요. 그분이 그러더군요.
"야 임마, 너는 그래도 아들과 2년 반 동안 얘기했잖아. 자식이 말도 없이 가버린 나보다는 복받은 거야."
"자식의 아픔을 옆에서 눈뜨고 지켜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더라."
서로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구요. 유성이가 가기 이틀 전에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가 온통 하얀색이었어요. 염증이 폐를 다 덮어서....그걸 보고 있는데 아버지로서 참....
제가 의사다 보니까 그렇게 병에 질 거라고 생각은 안 했죠. 약이란 약은 다 써도 안 듣고, 저를 보면서 엑스레이 사진 어떠냐고 물어보는데.....목은 메이고 가슴이 미어지지만 힘들 것 같다고 아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이놈이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한 마디하더군요.
"아버지, 저 지금 꼭 가야 해요?"
"삶이 죽음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니....내가 대신 가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다. 미안하다......"
그 마지막 3일 동안 눈물이 마른 적이 없죠. 아픈 자식을 옆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어느 부모든 똑같을 거에요. 자식이 감기만 걸려도 대신 아파주고 싶은데....
유성이가 마지막으로 가면서 저를 쳐다보던 눈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표현을 못하니까 저를 가만히 쳐다보는데, 저도 자식 얼굴을 보고 둘이 눈을 맞추고 몇 시간을 있었어요. 호흡이 점점 80, 70, 60, 50번으로 떨어지고..
혼수 상태 직전에 유성이가 그러더라구요.
"아버지, 나 죽으려나 봐..."
그 상황에서 해줄 게 아무것도 없죠. 아버지로서.... 그때 생각하면 유성이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미어지고 찢어지는 마음은 말로 못하죠. 먼저 간 그놈이 가끔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막상 아들을 보내고나니까 한동안 무력감과 죄책감이 떠나질 않더군요.
그래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은 전부 그 약속과 연관이 되는 일들입니다. 일 주일에 이틀은 이곳 병원에서 암환자, 마약환자와 상담하고 '대전 소망호스피스'라고 제가 개설한 곳읹데, 거기에서는 말기 암환자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그는 전재산을 털어 병원을 열었다.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운 병원에서 그는 아들과 같은 환자를 수없이 만나며,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기 암환자가 갈 데가 없어요. 대학병원에 가도 입원할 병실이 없고....더 이상 해줄 치료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집에 있으면 가족들이 이삼일을 못 버팁니다. 엄청난 치료비를 부담하느라 어려운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여기서는 저렴하게 환자들이 가는 길을 지켜주며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여기 말고도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강의하고 약물 복용과 에이즈 상담 등 일정이 빡빡하죠.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힘들지만 하나라도 관둘 수 없어요. 제가 만나는 분들이 너무 힘든 분들이니까,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지탱하기 힘든 분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위해 하는 일들을 하나라도 더 했으면 했지, 줄일 수가 없어요.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물질적인 면은 생각을 못합니다. 마약환자들한테 무슨 돈을 받겠어요. 마약환자들한테 우리가 돈을 줘야죠. 호스피스 말기암 환자들에게도 줘야 하고, 범죄자들은 자기 삶 하나도 못 꾸리니 또 줘야하고....
항간에 그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뭐 먹고 사냐고, 저는 밥 먹고 산다고 대답해요. 어차피 갈 때 보면 하나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럴 바엔 기분 좋게 다 나눠주고 가야죠. 다행히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서 뛰니까 어떤 면에서 자랑스럽기도 하고....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라고 자부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아들의 힘이 컸죠.
유성이에게 참 감사해요.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때때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유성이는 부모의 마음에 깊은 슬픔을 남긴 아들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행복감을 안겨준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강의를 듣기 위해 신촌역 마당으로 들어서는 대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먼저 간 아들을 떠올리고 있었으리라.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사는지, 그런 연습은 잘 되어 있는 반면 전혀 준비가 안 되는 게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젠가 죽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가기도 합니다.
지난 추석 때, 나 오늘 교통 사고로 죽겠다는 분 아무도 없었겠죠?
100층이 넘는 무역센터 건물에 비행기가 날아들 거라고 생각한 분 역시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듯 우리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맞이해야 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많이 다릅니다.
어느 날 암환자 한 분이 상담을 하러 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과 20년 동안 별거 생활을 하던 중에 암에 걸렸는데, 그분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아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과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날마다 불면증에 시달렸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분의 얼굴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물어봤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분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남은 생애 동안에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왕이면 멋있게 살다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때부터 옆에 있던 암환자를 도와주기 시작한 거에요. 똥오줌 다 받아주고, 씻겨주고, 옷도 갈아입혀주고....어느 날 보니까 도움을 주는 분이나 받는 분 모두 얼굴이 좋아지는 거에요. 병이 낫는다, 안 낫는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분들의 삶이 질이 좋아진거죠.
제가 만나는 환자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힘을 얻은 분들이 많아요.
웃으면 기뻐지고, 기뻐지면 웃음이 나와요. 지금이라도 웃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냥 웃는 연습만 해도 엔돌핀이 막 솟아나요. 꽃을 보고 사는 사람과 가래침을 보고 사는 사람의 면역이 다르듯, 웃는 얼굴을 가진 사람과 항상 인상만 쓰는 사람은 현저히 차이를 보입니다. 인상쓰며 우울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웃으며 당당하게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갈 겁니까? 웃으며 사는 것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삶입니다. 긍정적으로 사는 게 여러분의 면역에 도움이 되거든요. 면역이 떨어지면 병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옛말에 생(生)과 명(命)중에서 '생'은 사람이 노력해도 되지만 '명'은 하늘의 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직접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얼마나 사느냐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바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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